[칼럼] 4차산업혁명, 유령 같은 허상이 되지 않으려면?

[이뉴스코리아 박은혜 칼럼니스트]

아인슈타인(사진출처=픽사베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있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설명이라는 것, 그리고 쉽든 어렵든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우선은 그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4차산업혁명에 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적용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4차산업혁명이 유령과도 같은 허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4차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나서 그것을 할머니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4차산업혁명이라면, 그러한 4차산업혁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다.

4차산업혁명, 정말로 허상일까?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4차산업혁명이 유령과도 같다고 비판하는 시각에는 크게 3가지의 관점이 있다.

첫째, 4차산업혁명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행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 4차산업혁명이 화두로 등장한 것은 3차산업혁명에 관한 논의가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권에서 『3차산업혁명』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을 초청한지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박근혜 정권은 『4차산업혁명』의 저자 클라우스 슈밥을 초청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재인 정권에서는 5차산업혁명의 저자를 섭외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4차산업혁명이라는 유행어가 마치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염려한다. 플레이스홀더란, 많은 것을 가리키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매우 부족한 개념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용어를 쓰는 속내는 서로 다른 셈이다. 지난 2017년 대선 당시에도 상위 5명의 후보가 모두 저마다 다른 내용의 4차산업혁명 관련 공약을 제시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둘째,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 자체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4차, 산업, 혁명, 이렇게 각각의 단어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들이 가능하다. 정말 3차가 아닌 ‘4차’인가? 정말 경제나 문화 혁명이 아닌 ‘산업’ 혁명인가? 정말 점진적 발전이 아닌 ‘혁명’인가? 제러미 리프킨은 3차와 4차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한 개념이기 때문에, 사실 4차는 3차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어떠한 산업 혁명도 산업만의 혁명에 그치지는 않았던 반면, 지금의 4차산업혁명의 경우에는 진정으로 혁명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견해들이 적지 않다.

셋째, 4차산업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지칭되는 변화들은 대개 인공지능, 로봇, 드론, 사물인터넷, 증강현실, 자율주행자동차, 블록체인 등과 같은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자면, 4차산업혁명은 불가피하게 다가올 미래이며 동시에 이미 도래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기술에 의해 설명하려는 이러한 기술결정론이 과연 정당한 논의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세 가지 비판들은 물론 어느 정도 타당한 지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4차산업혁명을 유령으로 치부해버려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가올 4차산업혁명이 허상이 되지 않도록,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더욱 나은 방향으로 이끌도록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4차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현실일 수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허상이 아닌 분명한 현상
구글트렌드 검색에 따르면, 특히 지난 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4차산업혁명이라는 키워드가 급증했다고 한다. UCLA의 컴퓨터공학 교수 데니스 홍은 실리콘밸리에서조차 4차산업혁명이란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실체가 있어야만 유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유행이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한 선진국에서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떠든다는 지적 역시 그리 타당한 비판은 아니다. 과거 우리는 선진국에 이러이러한 것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없으니 선진국을 따라가야 한다는, 소위 추격주의(catch-up)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추격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벗어나야 할 사고방식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역으로, 선진국에는 없는데 우리에게만 있다는 지적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추격주의적 사고방식일 것이다.

우리에게 4차산업혁명은 분명한 현상이다. 그것이 존재하든 말든, 그 실체가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떠들고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4차산업혁명에 관한 각종 행사와 관련 서적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관심 없는 이들도차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4차산업혁명과 기독교 세계관』 같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책들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현상은 담론을 만들어낸다. 우리나라에서 4차산업혁명에 관한 담론은 매우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다. 즉, 과거의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선진국을 뒤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ICT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4차산업혁명 만큼은 우리가 앞장설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연구 주제들을 콕 집어 적극 지원하거나 관련 주제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공고하고 있고, 기업이나 연구소에서는 각족 제안서 앞에 으레 4차산업혁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이 정도가 되면, 4차산업혁명은 단순한 유행어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것이 특수한 국면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되짚어보고 반성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음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4차산업혁명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들, 즉 창의력, 융합, 비판적 사고, 협업과 같은 가치들은 결코 현재의 우리 사회 구조 속에서 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입시 위주의 경쟁 사회, 신자유주의적 체제 속에서, 4차산업혁명이 제시하고 있는 가치들은 분명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며 무엇이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짚어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4차산업혁명에 관하여 계속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때로는 공허한 플레이스홀더일지라도, 그 안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다양한 우리의 이야기들만큼은 결코 공허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허하지 않은 이야기를 더 많이 담아내는 플레이스홀더 역시 더 이상 공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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