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말아야할 아픈 이름 “위안부(慰安婦)”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중 가장 기억하기 싫은 순간을 꼽으라면 일제강점기를 꼽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일본에 합병이 되었고, 그 기간동안 일제는 전쟁동원을 위한 자원조달을 명목으로 수많은 재산과 인재를 약탈해 갔으며, 그 당시의 대한민국의 일반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조금씩 국력을 회복해갔으며, 다시금 세계 강대국 중 하나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국가 경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일제강점기에 피해를 겪었던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중 위안부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과거 중 하나이다.

위안부 소녀상, 소년상(사진=양보현 기자)

일제는 인력 착출을 목적으로 대한민국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징집하였는데, 이는 농촌정신대·보도정신대·의료정신대·근로정신대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여성으로만 구성된 경우를 여성정신대라고 불렀다.  여성정신대의 일부가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됨에 따라 정신대라는 말이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일제는 이를 통틀어 종군위안부라고 표현하였다. 종군위안부라는 뜻에는 종군기자처럼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나아가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함께 숨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제는 엄격하고 악랄하게 위안부 인원을 통솔하였는데, 허락된 장소 이외에는 외출이나 산책이 금지되었으며 시간도 제한되었다. 헌병대와 경비담당부대가 위안부들의 도주방지 및 질서유지를 담당했고 당직장교가 위안소를 매일 순찰하였다. 때때로 탈출을 시도하는 위안부들도 있었으나 감시가 너무 엄중해 총에 맞아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한달에 한번 성병을 위한 정기검진을 빼고는 휴일이 없었다는 것이 입증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한국인 위안부들은 연합군에 붙잡혀 수용되었고, 일부는 조선인회나 고려인회 등을 결성해 한국의 미군정 당국이 주선한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하고 싶어도 배편을 구하지 못해 눌러앉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수치심으로 오키나와·타이·베트남·대만 등지에 남아 귀국하지 못한 위안부들도 많았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혼인을 해도 임신을 할 수가 없었다. 마땅한 생계수단 또한 찾기 어려웠으며 정부는 이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그들은 암울한 역사가 강요한 정신적·신체적·경제적 고통과 여성으로서 차마 말못할 수치심의 멍에를 끌어안고 여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1994년 현재 일본 정부에 이들의 배상을 청구중에 있고, 국제인권사면위원회에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제소한 상태이지만 적절한 배상을 받지 못하였으며, 최근 전 정부가 독단적으로 일본에게 사과를 수용함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여성 가족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주제로 국내 외 유명작가들의 예술작품과 주요 사로가 함께 전시되는 특별한 기획전을 마련할 예정이다. 이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특별기획전으로 ‘하나의 진실, 평화를 향한 약속’으로 개막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과 희생을 기억하고 남아 있는 이들이 행해야 될 모습을 새로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