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대중적인 콘텐츠의 지극히 마니악한 재해석, 문근영·박정민의 ‘로미오와 줄리엣’

박정민(왼쪽), 문근영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사진제공=샘컴퍼니)

‘로미오와 줄리엣’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베로나나 파티 신은 없다. 합이 착착 맞아 들어가는 검술 신도 없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음에도 마냥 순진하기만 한 10대의 눈빛도 없다.

그 빈자리에는 미래의 어디쯤 혹은 TV나 영화 스크린의 프레임처럼 보이는 미니멀리즘의 무대장치, 원작에 충실한 대사들 그러나 극단적으로 현대화된 연기와 사랑의 표현들 그리고 첫사랑에 휩쓸려 열에 달뜬 눈빛과 행동들이 들어섰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의 친구인 벤볼리오 김성철과 머큐쇼 김호영.(사진제공=샘컴퍼니)

‘로미오와 줄리엣’만 벌써 몇번째, ‘십이야’, ‘햄릿’, ‘한여름 밤의 꿈’, ‘페리클래스’ 등 셰익스피어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양정웅 연출은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작업 중 “원작에 충실하겠다”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성별을 바꿔버릴 정도로 파격적인 재해석을 즐기는 양정웅 연출이 원작을 그대로 뒀을 리 만무다.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처럼 거침없는 소년 로미오(박정민)와 소녀 줄리엣(문근영)의 첫사랑, 두 사람을 둘러싼 가문의 갈등, 그 갈등의 씨앗이 되는 친구들과의 우정 등을 버무려 새로운 ‘로미오와 줄리엣’을 탄생시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박정민과 문근영을 비롯한 머큐쇼 김호영·이현균, 벤볼리오 김성철, 티볼트 양승리, 패리스 김찬호 등 젊은 배우들과 베테랑 로렌스 신부 역의 손병호, 유모 역의 서이숙·배해선의 균형도 적절하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대결을 벌이는 티볼트 양승리(왼쪽)과 벤볼리오 김성철.(사진제공=샘컴퍼니)

초반의 로미오는 한없이 가볍고 개구지다. 그의 친구들인 머큐쇼, 벤볼리오와 더불어 무대를 휘저으며 소년다운 면모를 발휘한다. 박정민은 그 개구쟁이 소년같은 로미오에 꼭 어울리며 머큐쇼, 벤볼리오 역의 김호영·이현균, 김성철과의 어울림도 좋다.

줄리엣은 순진하지만 사랑에 적극적인 소녀로 표현된다. 문근영은 ‘국민 여동생’답게 순진하면서도 갑자기 찾아온 첫사랑에 달뜬 줄리엣을 마냥 풋풋하지만은 않은 소녀로 분했다. 로미오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사촌오빠인 티볼트를 죽였다는 소식에는 원망을 털어놓기도 하는 어린 소녀의 면모도 흥미롭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사진제공=샘컴퍼니)

다소 아쉬운 요소는 무대 보다는 TV 연기가 더 익숙한 젊은 배우들이다.

초반 통통 튀며 소년다운 매력을 발산하다 사랑의 열병에 달떠 진지해지는 로미오 역의 박정민도, 정숙하지만 사랑에는 솔직하고 열정적인 줄리엣 역의 문근영도 마치 서툰 첫사랑처럼 어색하고 서툴게 대사를 하고 무대를 오르내린다.

더불어 줄리엣과 결혼하고자 하는 패리스의 사랑이 죽은 후에도 그리움에 무덤을 찾을 정도로 급작스레 깊어지는 전개도 아쉽기는 하다.

이처럼 서툰 연기와 대사 처리, 다소 아쉬운 개연성 및 전개 등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지는 최고 장점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 없을지도 모를 원작 대사를 고스란히 살린 셰익스피어의 언어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에 자리 잡고 있는 유려한 비유와 상징은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의 양날의 검과 같다.

자칫 지루하고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혹은 낯선 언어에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말의 맛은 살리면서도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게 변주됐다.

극의 호불호는 명확하다. 젊은 세대들에겐 TV나 영화에서 봄직한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재미를 주지만 화려하고 눈물겨운 정통 멜로를 원했던 중년 이후의 관객에겐 당황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콘텐츠의 지극히 마니악한 재해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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