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로 무장하고 소통에 나선 ‘이상한 나라’의 만화가 이현세

“재판이 끝나고 나니 제 자리가 없었어요. 신문 연재, 만화 잡지는 거의 사라지고…돈 주고 만화를 보는 세상이 아니었죠. 내가 이렇게 힘들게 그린 걸 공짜로 본다고? 반발심이 들었죠.”

1997년 ‘천국의 신화’ 5부 ‘대단군’ 연재 중 음란물 제작혐의로 기소돼 6년간의 재판을 끝내고 나니 쉰이 눈앞이었다. 만화가 이현세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지치지 않고 발길질을 해대고 밟히고 밟혀도 땅을 딛고 일어서 눈을 부라릴 줄 아는 자신의 작품 속 ‘까치 오혜성’을 지독히도 닮은 작가였다.

기어코 외설 논란으로 절망을 안겼던 ‘천국의 신화’ 5부 연재를 마무리했다. 고조선의 건국으로 마무리된 ‘천국의 신화’ 5부는 고조선 건국부터 발해까지를 다루리라 다짐했던 긴 여정 중 이제 막 첫 발을 뗐을 뿐이었지만 그는 그 대장정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사진=김지윤 기자)


◇은둔고수 이현세, 창작·소통 욕망으로 다시 중원에 서다

“이제는 끝이라고…이 얘기는 발을 떼자마자 미완성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그가 60세에야 돌아왔다. 절필 아닌 절필 후 한국사, 삼국지 등 학습만화를 작업하며 ‘은둔고수’처럼 9년을 흘려보낸 뒤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옛말을 그는 ‘절이 필요하면 중이 가야한다’고 역차용했다.

“작품 발표를 하려면 웹툰 아니면 시장이 없겠더라고요. 다행히 웹툰시장도 게임머니를 차용해 서서히 유료모델을 만들고 있었죠.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가능하면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싶었어요.”

코오롱과 일제 강점기의 복싱영웅 서정권 선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코리안 조’를 발표했고 레진코믹스에 ‘굿바이 썬더’를 연재하며 본격적인 웹툰작가로의 데뷔를 준비했다.

“두 늙은이의 생각이 맞았다고 할까요?”
그럴 즈음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에서 ‘천국의 신화’ 6부 연재를 제안해 왔다. 시장 독점, 사회적 책임 등과 더불어 10대 취향에 편중된 웹툰으로 비판받으며 작품의 다양화에 고심 중이던 네이버와 웹툰작가 데뷔 준비로 분주하던 이현세의 뜻이 정확하게도 맞아 떨어졌다.

새로운 연재에 앞서 1~5부까지를 말풍선, 페이지 등을 재편집하고 컷수를 조정해 서비스했다. 한여름에 시작한 작업은 2015년의 끄트머리에서야 완성됐다. 그렇게 2015년의 마지막 날 이현세는 ‘천국의 신화’ 6부 ‘봉황의 날개’ 연재를 시작했다. 그의 달라진 그림체에 너무 착해진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종이만화냐 웹이냐 보다 나이에 따라 그림체도 자연스레 변했어요. ‘굿바이 썬더’에서 그림체를 바꿨었는데 너무 재미있었죠. 그때 바뀐 그림체와 이현세 특유의 스타일을 믹스한 게 ’천국의 신화‘ 6부예요.”

▲(사진=김지윤 기자)

◇19금 보다는 또래와의 소통, 50금을 위해 19금을 버리다!

“세상과의 소통 아닐까요? 외로움이 무섭고 싫은거죠.”
최근 정미조, 윤항기, 박인희, 윤수일, 원미경 등 옛 스타들의 잦아진 재등장을 그는 ‘또래와의 소통 욕망’으로 풀이했다. 그 역시 그래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40대와 60대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라요. 그 달라진 관점의 이야기를 동년배들과 나누고 싶었죠. 제 작업은 감정에 정직한 행위예요. 나이 들어가는만큼 제가 재미 있고 좋아하는 작업을 하고 싶거든요. 생활에 찌들면 찌드는대로 성욕이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노인이 되면 되는 대로 제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에게 또래와의 소통 욕망은 19금까지 포기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천국의 신화’ 6부가 연재되면서 그를 법정에까지 세웠던 19금 코드는 완화됐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팬들도 늘었다.

“저도 19금은 아쉬워요. 저 역시 19금 이야기와 여자 몸 그리는 걸 아주 좋아하죠. 하지만 제가 소통하고 싶은 이들은 제 또래의 50대 아저씨들이에요. 제 나이 또래의 동년배가 많이 보는 만화를 그리고 싶은데 19금 만화는 로그인을 해야하고 본인인증도 해야하고…어렵고 복잡해서 안보더라고요. 50금 독자를 보게 하려면 19금을 풀어야 했죠.”

과연 고수다운 허 찌르기였다. 10대를 잡기 위해서가 아닌 동년배와 소통하기 위한 19금 해제가 10대 독자들까지 불러 모았다. “그들은 완전 보너스!”라며 껄껄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더벅머리 까치다. 그리고 그해 그는 신인상을 수상했다. 데뷔작부터 주목받았고 40대까지 월반하듯 자고 일어나면 원고료가 치솟는 시절을 보낸 60세의 그에게 생애 첫 신인상이 주어졌다.

“만감이 교차했어요. 쑥스럽고 즐겁고 부끄럽기도 하고 감격스럽고…초심으로 돌아간 것 같았죠.”

▲(사진=김지윤 기자)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이현세’라는 이상한 작가의 치열한 낭만여정

“고조선 건국까지는 그래도 쉽죠. 많이 알려져 있고 유추하는 순으로 가니까요. 하지만 고조선이 멸망하면 열국시대가 열리고 고구려, 백제가 건국되고 통일신라를 거쳐 가야까지 ‘이현세’라는 이상한 작가는 어떻게 볼지, 어떤 순서로 풀어낼지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을 거예요. 주몽, 온조, 비류 등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소서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죠.”

현재 위만의 어린시절이 이야기되고 있는 ‘천국의 신화’ 6부의 진행에 대해 이현세는 놀리듯 운을 뗐다.

“신라나 가야 등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싫어하는 모호한 지점이 전 좋아요. 일반적으로 보는 고구려 정통성을 저는 또 다르게 볼 수도 있죠. 깊은 바다를 혼자 헤엄치는 기분이에요. 너무 좋고 편하고 자유롭죠.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것 같지만 꿈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거든요.”

이는 그의 데뷔작부터 2016년 연재작 ‘천국의 신화’ 6부까지를 아우르는 정서기도 하다. 부마다 등장하는 악녀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진취적인 여성이며 이같은 개인의 의지가 모여 기어코 건국의 위업을 달성하곤 한다. 이에 ‘천국의 신화’는 부마다 주인공이 바뀌는 인물 열전이기도 하다. 위대한 건국의 과정이 아니어도 고난은 있고 우정과 사랑, 의리와 배신, 승리와 희망은 존재한다.

“대다수 창업을 하는 사람들도 (건국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요. 재벌 2세로 태어나지 않는 한 다들 거치는, 21세기라고 없어지지 않는 과정이죠. 결국 개인의 의지가 핵심이에요.”

그가 고조선의 건국부터 발해까지 ‘이현세만의 동선’으로 풀어갈 ‘천국의 신화’를 그리는 이유기도 하다. 그렇게 ‘천국희 신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저마다의 ‘인물열전’을 꿰어 가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천국의 신화’ 6부는 이후 “박새가 아버지 역을 하게 될 거고 들매는 같이 가야할 친구고 초아는 무녀이면서 소서노같은 강력할 인물이 될 것”이라는 그의 귀띔이다.

▲(사진=김지윤 기자)


◇“자기가 아까워서, 너무 좋아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죠!”

“신라의 통일 비결은 뭘까요? 노블레스 정신이에요. ‘삼국사기 열전’에 보면 영웅이 86명이 나오는데 절반 이상이 신라사람이죠. 화랑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앞에 나섰어요. 신라의 통일은 그 노블레스 정신이 있어 가능했죠. 그리고 그런 노블레스 정신이 급을 나누는 골품제도에 묻혀 결국 망했죠.”

최근 웃픈(웃기다+슬프다) 유행어로 자리 잡은 헬조선. 수저계급론 등이 과거 멸망 직전의 신라를 떠올리게 하는 현세태에 대한 “노블레스 정신도 없는데 골품제도까지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분석이 날카롭다.

“육아, 교육, 취업 등이 불안하면 교육제도를 바꿔주고 학비를 깎아주면 되는데 그런 건 안하고 나라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죠. 또 기성세대들은 우리 고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힐난하죠. 그러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해요. 결국 이 세상엔 믿을 사람이 없어요. 징징대지 말고 각자 알아서 잘할 수밖에 없어요. 이 힘든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자존감을 넘어선 자기애가 있어야 해요. 자기가 아까워서 잘 살아야죠.”

근거가 없더라도 자기 확신 외에는 자신을 위로할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애’를 재차 강조한 그는 박찬호에 대한 일화로 메시지를 던진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자기애가 강하냐면…처음 미국에 갔다가 2군으로 밀렸을 때였어요.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는데 거울을 보니 자기가 너무 잘생겼더래요. 그런 자신이 너무 아까워서 못 그만두고 의지를 불태웠죠.”

그는 스스로를 ‘미완성의 이야기꾼’이라고 표현했다. 스스로가 분석한 이현세는 전문 분야도 없고 옥의 티도 넘쳐난다. 호기심이 넘쳐 한우물을 파지못해 완성도 있는 만화를 그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무장한 이야기꾼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그리는 데 두려움은 없었다. 너무 좋아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재미있으니까 미친놈처럼 하는 거예요. 답 없는 세상에 살면서 고통까지 겪어야 해요? 이럴 때일수록 하면 할수록 좋아 미치겠는 일을 해야죠.”

‘고난투성이’라는 한탄을 아드레날린으로 바꾼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외설 논란으로 법정을 드나들면서였다.

“달라진 건 없어요. 삶의 원칙은 간단하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 외에는 없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해요. 잠도 못잘 정도로 고민하고 결정해야할만한 일은 별로 존재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게 되거든요. 나이든 사람들도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삶에 대한 본질을 공부해야지 않을까 싶어요. 왜 살아야하는지 60부터 100세까지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렇게 그의 본질은 바람이나 먼지로 돌아가는 것,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내가 우주고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지금을 사는 것이다.

▲(사진=김지윤 기자)

◇종교도 국경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상한 나라’의 만화가

“20대 때 가장 충격을 준 사람이 존 레논이에요. 제가 70세까지 정신이 멀쩡하고 손이 움직여 우리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또래들을 위한 노인 동화를 만들고 싶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존 레논이 스무살에 말한 종교도, 국경도 없는 그런 세상이야기요.”

마치 혈풍이 불어 닥치기 직전의 중원 한가운데 선 무림고수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비장하기보다 여유가 넘쳤고 눈빛은 살기가 아닌 호기심과 생동감으로 빛났다. 말투는 장난기가 넘쳤지만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모두에게 투표를 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정치권이 정신을 차리지….”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편 가르기며 잘라내기에 열을 올리는 혼돈정국에 대해 우스갯소리지만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그는 명불허전 ‘고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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