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직·박정복이 외치는 힘내라 청춘! 연극 ‘헨리 4세’

▲초연 14년만에 돌아온 셰익스피어 원작의 연극 ‘헨리 4세 – 왕자와 폴스타프’에서 폴스타프와 헨리 왕자를 연기하는 이창직(사진 왼쪽)과 박정복.(사진=심건호 기자)

“미장원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지?” “미장센이요?”
“폴스타프도, 핫스퍼도 존경받는데 헨리 5세만 별 볼일이 없어.” “역사적으로 헨리 5세도!!”
“모든 건 다 비밀이 있어야죠?” “몇 번 보시면 알 수 있어요.”

진지해질 틈이 없는 이창직과 진지하다가 갑자기 욱하거나 개구쟁이가 돼 있는 박정복이 대화를 주고받는 품새는 이미 폴스타프와 헨리 왕자였다. 인터뷰 내내 10초에 한번씩 박장대소가 터지는가 하면 놀리는 이창직에 발끈하는 박정복이 잦게도 이어진다. 불지불식간에 그 전세가 역전되는 풍경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시극단에서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올린 연극 ‘헨리 4세 Part1&Part2 왕자와 폴스타프’(이하 헨리 4세) 속 폴스타프와 헨리 왕자를 보는 듯했다.

지난해 12월 ‘헨리 4세’의 대본 리딩 때 처음 만나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함께 체력훈련과 연습을 하고 밥을 먹으면서 절로 맞춰진 호흡은 고스란히 극 중 인물들에 녹아 들었다. 이창직의 “생각보다 너무 잘 나와서 문제”라는 너스레에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될 정도다.

▲제대로 된 군주가 탄생하길 바라는 스승 폴스타프 이창직과 복잡한 인물 헨리 왕자를 연기하는 박정복.(사진=심건호 기자)

◇베테랑 이창직, 신예 박정복, 그들의 기분 좋은 의기투합

“폴스타프는 제대로 된 군주가 탄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솔선수범하고 채찍질하는 인물이에요. 얘(헨리 왕자)가 (나쁜 일에) 발을 못 담글 때는 먼저 담그면서 놀리다가도 막상 왕자가 들어오려고 하면 발을 빼라고 말해주죠. 인생의 스승, 제대로 된 군주가 되도록 가르치기 위한 스승의 역할이에요.”

이창직은 자신이 연기하는 폴스타프를 ‘스승’이라고 소개했다. 2002년 초연부터 벌써 세 번째 폴스타프로 무대에 오르는 이창직은 김광보 연출로부터 “자체가 폴스타프”라는 극찬을 받은 배우다.

실제로 폴스타프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극히 사랑한 인물로 ‘헨리 4세’를 비롯해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폴스타프’ 등의 오페라가 만들어졌고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영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헨리 5세로 왕에 등극하는 헨리 왕자 역의 박정복은 “헨리 왕자는 단순하지 않은 인물이다. 생각도 많고 똑똑한 전략가로 대본으로만 볼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재밌는 인물”이라며 “체력적으로는 너무 힘든데 또 너무 재밌다”고 털어 놓았다.

박정복은 지난해 화가 마크 로스코의 화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연극 ‘레드’로 주목받은 신예다.

이창직은 헨리 왕자를 연기하는 박정복에 대해 “멋도 있고 방탕할 땐 방탕하고 놀 땐 놀고 즐거울 땐 즐겁고 약올릴 땐 약올리고…. 폴스타프를 약 올릴 정도의 경지에까지 올랐다”고 평했다.

“연습 초반에는 폴스타프가 되게 슬펐어요. 내(헨리 왕자) 위치 때문에 이 사람을 버려야하는 그 마음이 너무 아팠거든요. 분명 나쁜 건 줄 알면서도 군것질을 찾듯이 왕자도 폴스타프 자체가 나쁜 건 알지만 문득 문득 생각하고 그랬을 것 같아요.”

박정복의 헨리 왕자에게 이창직의 폴스타프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이창직의 폴스타프에게 박정복의 헨리 왕자는 이런 존재다.

“초연 당시 강신구(2016년 공연에서는 헨리 4세를 연기한다)의 헨리 왕자는 예리한 칼로 긁는 것처럼 카리스마 있고 예민했어요. 이 친구(박정복)는 날도 보이고 여유로움도 보여요. 기본적으로 골목대장 같은 기운이 있죠.”

▲2002년 초연부터 2016년 ‘헨리 4세’까지 이창직은 세번이나 폴스타프로 무대에 올랐다.(사진=심건호 기자)

◇나 이창직! 웃어도, 화를 내도 하루는 간다

“몇개월 동안 단 한번도 이렇게 해봐라 하신 적이 없어요. 마음껏 하라고 든든하게 응원해주셨죠.”

이창직 뿐 아니다. 김광보 연출부터 초연 때 헨리 왕자로 무대에 올랐고 2016년 공연에서는 헨리 4세를 연기하는 강신구, 맏형 황성대까지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누구 하나 그에게 “이렇게 해봐”라고 강요한 이가 없었다.

“선후배를 떠나 같이 일하는 동료니까요. 연극을 오래 하다 보면 잊는 부분들이 있는데 젊은 후배들이 일깨워주니 그들은 제 연기 스승이기도 해요.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죠.”

참으로 폴스타프스러운 이창직의 대꾸가 돌아온다.

‘헨리 4세’는 찬탈로 왕위에 오른 헨리 4세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고뇌와 헨리 5세가 왕의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창직은 ‘헨리 4세’에 대해 “시사성이 강한 작품이다. 패러디도 강하고 알레고리(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빗대 설명하는 방식)가 굉장히 많다. 셰익스피어가 대단한 게 수많은 알레고리들이 결국 그림을 완성시키고 현실이 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폴스타프가 헨리 왕자를 ‘지옥’이라는 의미의 ‘헬~ 왕자’라고 부르거나 왕의 자질을 지닌 ‘핫스퍼’, 수다쟁이 ‘스내어’ 등도 허투루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귀띔이다.

‘헨리 4세’의 묘미는 이처럼 장난 같지만 폐부를 찌르는 말장난에 있다. 그 말장난의 일등공신은 단연 ‘폴스타프 그 자체’인 이창직이다.

“살다보니 그렇더라고요. 기분이 좋아도 하루가 가고 화를 내도 하루가 가고 웃어도 하루가 가요. 남들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하나도 안심각한 경우도 있고 남들은 심각하지 않은데 저 혼자 심각해지기도 하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했더니 인생 자체가 나아지더라고요.”

이창직은 배우에게 유리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다. 20대에도 할아버지 역할을 했을 만큼 그의 신체는 한결같이 지금과 같았다.

“정말 잘하는 배우도 본 적이 없지만 정말 못하는 배우도 본 적이 없어요. 누구나 장단점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진 단점보다는 장점을 좀 더 많이 동원했어요.”

후배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이르고 화를 내봐야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부질없었다. 오히려 자유를 줬더니 이전처럼 다 못하지는 않더란다. 자신의 장점만으로도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면 못할 게 없다는 그의 연기철학이 2016년의 가장 바쁜 연극배우 이창직을 만들었다.

“쓰여진 지 400년이 넘고 500년 가까이 돼가는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폴스타프와 헬이 있었겠어요. 지금 제가 폴스타프를 하고 있는 게 중요하죠. 최후의 승자는 남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두고 보자’가 제일 중요한 말이죠.”

▲폴스타프와 헨리 왕자를 연상시키는 이창직과 박정복.(사진=심건호 기자)

◇‘헨리 4세’는 젊은이들을 위한 응원극 “힘내라 청춘!”

“결국 젊은 헨리 왕자가 헨리 5세가 되잖아요. 지금은 힘들지만 젊은 친구들이 결국 이 시대의 주인이 될 거예요.”

‘헨리 4세’는 제목과 달리 헨리 왕자가 폴스타프의 영향으로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유독 ‘젊다’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폴스타프의 “젊은 사람들아 너희 시대가 열렸다”거나 “젊은이들아 당당히 새 시대로 가라” 등 젊은이에게 힘을 주는 메시지나 대사도 적지 않다.

그리고 왕이 되기 위해 고심하는 헨리 왕자는 이 시대를 사는 헬조선의 청춘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헨리 4세’의 연출가인 김광보 서울시극단장은 “영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헨리 5세가 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청춘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 달라는 박원순 시장의 간곡한 부탁도 ‘헨리 4세’가 ‘젊은이들을 위한 응원극’이 되는 데 한몫을 했다는 이창직의 귀띔이다.

“젊은 친구가 결국 왕이 되잖아요. 은연중에 어른을 넘어서는 훌륭한 젊은이들에 대한 칭찬을 해주고 있어요. 끊임없이. 기분 좋잖아요. 용기도 생기고.”

이창직의 말에 박정복은 ‘상생’을 이야기한다. 박정복은 “얼마 전 영화 ‘인턴’을 보고 은퇴세대와 젊은 세다가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세대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공생을 통해 시너지를 찾아야할 때”라고 사뭇 진지해진다.

▲연극 ‘헨리 4세’가 청춘들에게 힘을 주기를 바란다는 이창직과 박정복.(사진=심건호 기자)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하게 연극배우로 살고 있는 박정복

“‘헨리4세’ 하기 전에 한 패션쇼에 조명 스태프로 아르바이트를 갔는데 10명 중 8명이 연극배우였어요. 정말 치열하게들 살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정말 한심하게 살았구나 했어요. 이들은 이렇게 치열하게 살면서도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헨리 4세’ 팀도 정말 치열하게들 하고 있어요.”

박정복은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20대 시절 일찌감치 영화, TV드라마로 발길을 돌렸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유명해지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적지 않은 경험을 통해 결국 좋은 연극에 출연하려면 인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십 편의 독립영화를 찍었지만 이 또한 녹록치 않았다.

“연기 자체를 그만 두려고 했어요.”
결국 그는 지쳤고 배우에 대한 꿈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역시 무대였다. 아르바이트로 뮤지컬 ‘고스트’의 대본 리딩을 하다가 외국인 제작진의 눈에 띄어 앙상블로 발탁돼 다시 무대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20대에 무대를 떠나 있으면서 그때 할 수 있는 연기를 하나도 못했어요. 얼마 전에 연극 ‘렛미인’을 봤어요. 오스카 역이 너무 하고 싶어 오디션을 볼까 했는데 제가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더라고요. 연기나 분장으로도 해결이 안되는 그런 연기요. 그래서 그때처럼 후회 안하려고 지금 20대 연기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무대를 즐기고 있는 박정복은 ‘헨리 4세’ 마지막 공연 이틀 뒤인 16일부터 차기작인 연극 ‘레드’의 연습에 돌입한다.

▲연극 ‘레드’, 뮤지컬 ‘올드 위키드송’ 등으로 주목받은 신예 박정복이 헨리 왕자를 연기한다.(사진=심건호 기자)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 싶은 배우들, 이창직과 박정복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저희는 생각도 못한 데서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요.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상황이나 사정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같은 작품이나 장면도 다른 감정이 생겨나곤 하죠. ‘헨리 4세’에서도 오욕칠정을 다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이창직의 말처럼 관객들은 연출자와 배우들에게 매번 다른 질문과 깨달음을 던지곤 한다.

두 사람은 ‘헨리 4세’ 최고의 장면을 검술신과 폴스타프·헨리 왕자가 내뱉었다는 “더 놀고 싶구나”라는 대사를 꼽는다. 무술 신을 위해 한달 넘게 매일 5시간씩 무술연습을 했고 수없이 합을 맞췄다.

“제 꿈은 관객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되는 거예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어렵기도 하죠.”

이창직의 말에 박정복은 “천천히 한발 한발 잘 걸어서 선생님 연배가 되면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의 꿈 역시 사랑받는 배우인 셈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