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팩’은 과연 우리를 진정 스팩타클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가?

(이미지 =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 표지의 일부)

[이뉴스코리아 권희진 기자] 장강명의 소설 ‘한국의 싫어서’에 나오는 주인공은 계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 지명과 헤어지고 호주로 떠난다.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이다.

교수 아버지를 둔 강남 출신의 지명에게 자신을 ‘2등 시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둘은 같은 대학교를 나왔지만 1등 시민과 2등 시민으로 나뉜다. 이 경계를 누구도 구획하지 않았지만 단 몇 가지 대차대조를 통해 그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촉’이 있다. 특히 한국이 싫은 사람들은 그 ‘촉’이 예민하게 발달해 있다. 피해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에 2등 시민을 나누는 주관적 경계라고 명명하고 해 둔다.

남자친구 지명은 여자친구 계나를 부모님께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강남의 중산층 가정에서 ‘내 아들의 여자’에 대해 호기심을 넘어 탐구심도 생길 법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궁금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미 내 아들의 여자의 보잘 것없은 스팩을 미리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빌딩 경비원이고 언니는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한 채 알바를 하며 심지어 동생은 백수인 미친한 스팩을 가진 여인을 만나는 아들에게 교수 아버지는 ‘이별을 권고’하는 이메일까지 쓴다.

스팩의 변변치 못함은 21세기 ‘신 대역죄’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모자란 스팩끼리 만나면 하등의 지장도 없다. 하지만 2등 국민의 자격으로 1등 국민의 세계를 넘본다는 것은 보통 가정 내 ‘물의’를 일으키게 되고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예비 시어머니의 ‘물 따귀’는 현실에서 부활하게 될 수도 있다.

주인공 계나가 실업의 간극 없이 취업에 성공하고 내키지 않은 사회 생활을 꾸역꾸역 버티며 삶을 버티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스팩에서 회복 불가능한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호주로 떠난다. 열심히 공부해서 지명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입학했지만 AS도 불가능한 그녀의 ‘신분’은 ‘2등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스팩은 한 사람만의 이력이나 경력 그리고 자격증 따위의 사회적으로 통용 가능한 수단를 넘어 그 사람의 출신이나 가계력(?)까지 포함한다. ‘엄친아’가 유행하더니 ‘금수저’가 뒤따랐다. 자식의 성공으로 인해 부모가 덕을 보는 사회가 아니라 부모의 ‘수저’가 자식의 계급을 결정하는 사회가 되었다. 어쩌면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계층을 뛰어 넘는 ‘기적’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명문대’와 ‘전문직’의 진입에 성공할 때 과거에는 남루한 출신 배경이 오히려 성공 신화를 더욱 빛내 주는 드라마틱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어학연수와 수 백 가지에 달하는 수시 모집 전형은 사교육과 정보력 없이 학생 개인의 노력으로 섭렵하기 불가능하다. 수시 모집은 대학에 합격한 학생과 낙방한 학생들이 자신이 왜 떨어지고 붙었는지 조차 이유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대학은 합격 기준을 발표하지 않는다. 수시모집과 수능이라는 시스템이 왜 유지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입시 개혁에 대해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고착화된 부조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난감한 입시를 마친 학생들은 여전히 익숙한 선발 전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명 ‘싸트’라고 하는 삼성 수능이 또다시 상위 계급의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대기 중이다. 한 때 삼성이 신입 사원 공채 선발 방식을 변형하자 서울의 각 대학 교수들이 사이에서 일대 파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삼성 고시에서 합격률이 떨어질 까봐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낫다는 정무적 판단에서였다. 교수들도 ‘삼성 고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한민국 엘리트는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스팩을 쌓고 다시 대기업 입사 시험을 뚫기 위해 또다시 스팩을 쌓는다. 제도와 인간의 노력 사이에는 사교육이라는 자본이 다양한 형태로 투입된다.

결국 수저 계급론이 등장한 배경에는 입시와 입사의 전쟁터에서 영광의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부모’라는 실탄이 필요한 사회적·문화적 분위기가 버티고 있었다.

경쟁을 거쳐 온 부모는 ‘학벌’의 위력과 공포를 체감한 세대였다. 학벌은 스팩의 과거형이다. 과거의 학벌이라는 스팩은 개인의 역량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고 상황의 변화에 순응해야 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었지만 요즘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모든 에너지가 ‘직수’되는 사회가 되었다.

(사진 =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 네이버 스틸 컷)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에서 취준생 정유미에게 동네 깡패 박중훈이 말했다.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거 TV보니까 프랑스 백수 애들은 취직 안 되니까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취직 안 된다고 자책하고 그러지 마. 네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아.”

한 100년쯤 시간이 흐르면 이 시대의 ‘스팩’은 어떤 정의로 규정될까 하나 확실한 것은  스팩으로 청춘을 분별하는 바람에 정작 모험과 도전은 꿈도 못 꾸는 경직된 사회가 되어 버린 건 아닌지 고민해 볼 문제다. 심지어 소설 “한국이 싫어서”처럼 진짜 한국이 싫어 떠난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이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