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기획 인물 리뷰] 이순신 장군 가상인터뷰 3부 – 영웅 이순신

※본 내용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내용입니다.

420년 전 정유년 1597년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는 기적을 쓴 해이다. 2017년 정유년을 맞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지난 <2부 – 장군 이순신>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역사에 남는 장군이 될 수 있었던 전쟁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3부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삶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후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Q. 삶의 마지막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후에 보화도(목포 근처)를 본거지로 삼았다가 다음 해 2월에 고금도로 영을 옮겼습니다. 그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며 전쟁 준비에 힘썼습니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백성들도 하나둘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 진의 위용과 규모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가 넘게 능가할 수 있게 되었죠. 이렇게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도움과 장병들의 노력이 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을 생각하며 전쟁을 치렀다 (사진= 영화 ‘명량’ 포스터 다음 영화)

그러던 중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일본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습니다. 당시 일본 군은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로 전쟁에 나서지 말라는 모략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우리 군은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습니다.

그러한 전쟁 중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저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고 말았죠. 그리고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 이순신 장군의 죽음 그 후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운명을 지켜보던 장군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이순신 장군의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함께 출전한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도 이순신 장군을 평하여 위대한 장군이자 영웅이라며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사진=박양기 기자)

이순신 장군은 지극한 충성심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위대한 통솔력으로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 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 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여 만든 영화와 드라마 등의 미디어 작품도 많다. 70년대 제작된 영화 ‘성웅 이순신’,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이순신 장군의 청년 시절이 나오는 ‘천군’ 그리고 비교적 최근 개봉해 인기를 끌고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게 한 ‘명량’.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 ‘임진왜란 1592’ 등으로도 제작이 이루어졌고 인기를 끌었다. 또한 뮤지컬, 도서 등으로 이순신 장군은 계속 우리에게 언급되며 회자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 포스터 (사진= 다음 영화)

최근에는 MBC ‘무한도전’에서 역사X힙합 프로젝트에서 하하와 송민호가 부른 노래 ‘쏘아’의 주제 인물이 되어 다시금 그의 위상이 널리 알려졌다.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우며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에 충을 다 한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는 지금도 주변 국가의 입김과 역사분쟁, 군사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군 지휘자들과 국가 고위계층들은 외교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에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국민을 등한시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모습들만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역경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영웅이 되었다. 2017 정유년 국민은 나라에 닥친 혼란과 경제 위기에 맞닥뜨렸다. 420년 전 정유년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며 위기를 기회 삼아 역경을 이겨내는 태도와 지혜를 구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