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혼자있고 싶어요, 관태기 [사회이뉴]

사람의 인간관계는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여러 사람을 만나고 태어나는 순간에도 의사를 비롯한 사람을 만나며 시작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처럼 여러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인간관계는 놀이방, 유치원, 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차 확장되어간다. 물론 이웃이나 친척 등의 관계도 있다.

인터넷이 발달한 뒤로는 인간 관계의 확장이 더 빠르고 쉬워졌다. 환경 자체가 달라지다 보니 인간관계를 맺는 모습도 많은 형태로 계속해서 달라졌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을 전달해야 했던 시대에서 손가락만 조금 움직이면 말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의사전달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뇌의 신호를 받아서 의사 전달을 하는 수단도 개발된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전 세계 누구와도 연락할 수 있고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사진= 픽사베이)

이렇게 환경이 달라지다 보니 인간관계의 장이 되는 주 무대도 자연스럽게 정보 통신 기술의 산물인 인터넷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개발과 수 많은 애플리케이션의 개발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제 스마트폰 하나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간관계를 한다. 그냥 무작정 인터넷이 발달하고 통신 기술이 발달했다고 인간관계의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니다. SNS 서비스의 시작과 발달로 인해서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새로운 사람과 연결되는 인간관계 망에 포함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연결망으로 인해서 헤어졌던 가족이나 친구, 잊고 지내던 친한 사람들과 연락이 닿게 되고 다시 만나게 되는 등의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 과도한 인간관계 연결과 노출 때문에 사람들은 관계에서의 피로를 느끼며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관태기는 인간 관계의 피로와 회의감을 대변하는 단어다 (사진= 픽사베이)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사회관계 서비스망(SNS)에서 관태기 라는 말이 먼저 등장했다. 관계권태기를 합한 이 단어는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고 피로함을 느낀다는 의미가 있다.

인간관계가 권태기라는 단어가 쓰일 정도로 스트레스가 되는 이유는 친한 친구나 오래 만난 연인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편하게 주고받는 사이보다는 사회생활에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인간관계가 주를 이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핸드폰 연락처에 수백 개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있고 SNS상의 친구나 팔로워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정작 필요할 때 연락할 한 명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성 들여 쌓아온 관계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SNS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다 보니 자유로운 표현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표현과 모습들을 게재하며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이 보는 자신의 가짜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게 된다. 이로인한 피로는 또 다른 피로감을 느끼게 하며 자유가 아닌 억압으로 다가오게 된다.

연락처에 등록되어있는 사람은 많지만 편하게 연락할 사람은 없다 (사진= 픽사베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들이 지옥이다”

라는 표현까지 했다. 타인을 자아실현의 거울과 동반자로 생각하기보다 사회에서의 의무적인 관계로 여긴다면 이러한 표현이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등에 업고 먼 길을 걸어간 병사는 혼자서 걸어간 병사보다 체력적으로 지쳤지만 체온이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와 관계하며 살 수도 없다. 좋아요 버튼과 백 번의 하트보다는 진심을 담은 눈빛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와 토닥임이 더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결코 숫자가 관계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누군가와 등을 맞대고 관태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